입큰붕어

시간이 내어주는 그래프

김태인

사내 아들 녀석이 있다. 막내 녀석이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부터 무지막지하게 먹기 시작했다. 먹고 자는 일 외엔 다른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걱정스러웠다. 밥상머리에서는 교육이나 훈육 등, 잔소리로 들릴만한 내용은 피하고 재미나는 내용의 대화를 나누며 밥상을 비워야 한다는 다짐을 어느 순간 나는 망각한다. “아들아? 어느 정도 나이가 들었다면 그렇다 해도 너처럼 젊은 사람이 너무 뚱뚱하면 왠지 여자 친구도 사귀어 보지 못할 것처럼 보이더라. 자신도 돌보지 못하거나 책임지지 않는 게으름뱅이로 보이더라. 성격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왠지 줏대 없어 보이더라는 둥” 끝내 참지 못하고 충고랍시고 무책임하게 쓴 소리 몇 마디씩 내 뱉곤 했다. “아빠 생각이잖아요,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 했어요. 편견이에요. 인신공격이에요” 뜨끔했다. 아프다. 개까지 들먹이며 인신공격이라는 대응에 상처가 되었구나 후회하고 곧 방법을 달리하여 건강을 들어 계속 자제를 요구했다. 그 때마다 몇 번인가 반항하는 듯하더니, 어느 날 부터인지 잔소리가 시작된다 싶으면 ‘또 시작이시네’ 시큰 둥한 표정과 반응으로 대처하며 무지막지하게 계속 드시는 거였다. 녀석의 반응이 그러하니 먹는 문제 때문에 한 대 쥐어박을 수도 없고 계속 잔소릴 늘어놓자니 무반응으로 대응해 오니 달리 방법이 없는 것 같아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어느 사이 녀석이 중학교 1학년이 되었다. 교복을 입고 등교하려는 막내 녀석을 보자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오더니 눈시울이 붉어져왔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고2가 된 녀석의 누이보다 항상 불안해 보이고 믿음이 가지 않던 막내 녀석. 언제보아도 철부지 같던 녀석이 중학생이 되었다니 믿기지 않았다. 왠지 뿌듯하고 든든한 느낌이 드는 기분을 처음 느꼈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세상 모든 사물에게 그래프를 내어 준다. 내게 주어진 그래프. 내가 그리며 지나온 궤적 또한 순탄하거나 반듯하지만은 아니했다. 무수히 넘어야할 거친 산과 들 그리고 바다가 녀석 앞에 놓여 있기에 녀석이 벽에 부딪히며 분노 하거나 반항, 좌절할 때마다 부모로서, 먼저 살아온 선배로서 내가 사는 마지막까지 인내하며 묵묵히 받아주고 안아줘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어느 날 이었다. “아빠, 나 오늘부터 살 뺄 거예요, 뚱뚱하다 더 이상 걱정하지마세요” 믿기지 않았다. 녀석 스스로 내게 약속을 하다니. “엄마, 이 김치는 2% 맛이 부족해요, 간이 맞지 않아요. 김장종류는 야채에 물이 많이 스며있기에 잘 절여야 해요. 엄마, 이 국은 내용물에 비해 국물이 너무 많잖아요. 이 찌게는 조금 더 얼큰해야 해요” “이 찌게 맛이 어때요? 이 반찬 어때요?” 아내의 물음에 한 마디도 따지지 못하고 차려주는 대로 맛있게 먹으며 언제나 감읍해 하는 표정을 짓는 나와는 달리, 내가 느꼈던 부족한 맛을 정확히 꼬집어 내어 대신 엄마에게 훈수를 늘어놓던 녀석, 자칭 미식가라 자부하던 녀석이 스스로 살과의 전쟁을 선언한 것이다. 여자 친구가 나타난 것일까?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드디어 남을 의식하기 시작한 것일까. 왜지?

어제였다. 퇴근 후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가방을 매고 보도를 걸어가고 있는 제법 날씬하고 씩씩해 보이는 사내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였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뒤 테네!” 아들 녀석이었다. 남극의 펭귄이 다시 날아 오르는 모습을 보게 된 것처럼 놀라웠다. 기뻤다. 이 녀석이 언제부터 이렇게 날씬 했었지? 언제부터 이토록 늠름하게 보였지? “아들아, 너 진짜 내 아들 맞니?” “우째 이런 일이, 참으로 어이없다. 세상에 자식도 못 알아보는 아빠도 있네요?” “히히히. 하하하” 아들 녀석과 즐거운 대화가 차안에서 이루어졌다. “여보, 우리 아들이 아닌 줄 알았어요.” “호호, 말 마세요, 살을 빼겠다더니 근 3개월 째 저녁은 굶다시피 하고 있어요. 내 아들이 저렇게 독한 애 인줄 요즘에 알았어요.” “그러게, 오직 먹는 낙과 재주밖엔 없는 줄 알았었는데 하하하” 그렇다. 시간은 우리가 바라는 많은 것을 해결해 주거나 가르쳐 주기도 하지만 가진 모든 것을 빼앗거나 잊게 하기도 한다. ‘시시각각, 상황, 상황마다 주어지는 삶의 의미부여!’ 나이 마흔이 넘던 시절부터 줄 곧 스스로 다짐해 오고 있다. 그래, 내가 살아가야 할 남아 있는 앞날에 대한 삶 중 온전한 나의 몫은 이제부터는 30%뿐이야. 나머지 70%는 나의 가족과 나의가족이 살아가야할 사회, 그러니까 네가 뿌린 씨앗인 나의 자식들을 제대로 길러내어 제대로 된 건강한 사회 일원으로서 제대로 된 행복한 삶을 영위하도록 해야 할 의무가 너에게 있는 것이야.

그런데 여보게 태인? 내가 묻겠네, 제대로 된 행복이 어떤 것이며, 제대로 된 삶은 어떠한 삶이어야 한다 생각하는가? 그래서, 분명한 결론은 얻었는가?

-본문 내용 중 비만에 대해 편협 된 언급이 있었습니다. 이 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 무렵 걱정되고 답답하여 본의 아니게 부정적으로 인용하였음을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